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헨리 키신저 (문단 편집) == 생애 == [[1923년]] [[바이마르 공화국]] [[바이에른|바이에른 자유주]]에서 [[유대인]] 집안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따라서 본 이름은 독일식인 '하인츠 알프레트 키싱어(Heinz Alfred Kissinger)'였고, 헨리 키신저는 미국 이민 후 영어식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 [[파일:external/media.news.harvard.edu/HKissinger_s.jpg|width=250]] || || 젊은 시절의 모습. [[1950년]] [[하버드대]] 졸업 사진이다 || [[1938년]] [[나치]]의 유대인 이주 정책에 의해 가족 전체가 [[미국]]으로 이민했다. 나치 통치 기간동안 키신저와 그의 친구들은 히틀러 청소년 갱단에게 학교폭력을 당했다.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친 후 야간학교를 다니기 시작했고 낮에는 면도기 공장에서 일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뉴욕]]에 위치한 [[시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회계학을 파트타임 학생으로서 공부했다. [[1943년]] 초반에 [[미군]]에 입대함으로 학업이 중단되었다. 이때 훈련을 받으면서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고 [[제2차 세계 대전]]에도 참전했다. 전후 [[미국]]으로 귀국해 [[하버드 대학교]]에 입학했다. 정치학을 전공한 그는 1950년 학사 학위를 최우수(summa cum laude) 성적으로 취득했다. 그 후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1951년]]에는 정치학 석사, 1954년에는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학위 취득 후 [[하버드]]에서 국제정치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정부 관련 일을 했다. [[1957년]]에 <[[핵무기]]와 외교>라는 저서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대량보복전략'을 비판하여 학자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당시 키신저의 저서는 [[미국]] 뿐만 아니라, 적성 국가였던 '''[[소련]]의 군부'''에서도 높이 평가되었다. 당시 [[소련]] 군부는 [[핵무기]] 만능주의를 맹신한 [[흐루쇼프]]가 100만 단위의 병력을 감축하고, 함대 건설 프로젝트를 취소하며 남은 자원을 [[미사일]]과 [[핵무기]]에만 쏟아붓자 이에 크게 반발하며 핵 보복에 대한 집착은 결국 멸망과 백기투항 두 개의 선택지만 남겨 놓을 것이라면서 그 근거로 키신저의 저서를 들었다. 아울러 그는 [[19세기]]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가 주도했던 '[[빈 체제]]'에 정통했다. 키신저의 박사학위논문 『회복된 세계(''A World Restored: Metternich, Castlereagh and the Problems of Peace, 1812-1822'')』가 바로 빈 체제를 다룬 논문이었다. 이는 훗날 자신이 외교관으로 재직할 때 많은 영향을 미쳤다. || [[파일:external/i.telegraph.co.uk/kiss_1793262c.jpg]] || || 닉슨과 함께[* 두 사람이 함께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되는 등 '''닉슨과는 한 세트'''로 엮인다. 비슷한 사례로 중국의 [[마오쩌둥]]-[[저우언라이]]가 있다. 참고로 동시기의 사람이며 네 사람 모두 만난 적이 있다.] || [[1969년]] [[리처드 닉슨]]이 [[미국 대통령]]이 되자 국가안보보좌관에 발탁되었다. 이 당시 키신저의 업적 중의 하나가 [[베트남전]]을 종식(정확히는 평화협상 체결)시킨 것이었다. 당시 [[호치민]]이 이끌었던 [[북베트남]]은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미국]]과의 협상을 거부했는데, [[미국]]으로서는 아무리 전술적인 승리를 거두어도 답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닉슨 행정부는 핵 전쟁으로 [[페이크]]를 걸면서 [[소련]]을 위협함으로써 [[소련]]을 움직여 [[북베트남]]을 협상장으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참고로 이렇게 허세와 쇼를 적절히 섞은 전략이 바로 '[[미치광이 전략]]'이다. [[도널드 트럼프|트럼프]] 행정부가 [[북한]]을 상대로 구사하면서 유명해졌던 바로 그 전략이다. [[미국]]은 미치광이 전략으로 모양새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베트남전]]에서 발을 빼는데 성공했다. [[남베트남]]은 [[제럴드 포드|포드]] 행정부 시대에 망하고 말았지만. [[1971년]] [[7월]], [[미국]] 최고위급 인사 중에서는 '''역사상 최초로'''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을 '''극비''' 방문했다. 이때 키신저를 맞이한 것이 [[예젠잉]]과 [[황화(1913)]]. [[미국]] 측 비밀 특사로서 [[키신저-저우언라이 회담]]을 개최, [[저우언라이]]를 만나 [[미국|미]]-[[중국|중]] 양국의 관계 개선 방안을 논의했고, 이듬해 [[닉슨-마오쩌둥 회담|닉슨의 중국 방문]]을 성사시켰다. 이 시기는 소련과 중국의 관계 악화가 심화중이던 시기이고 이때 미국은 중국을 미국편으로 끌어들여 이용해 소련을 견제해기 위함이었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Kissinger_Mao.jpg]] || || [[마오쩌둥]]과 함께. 뒤쪽에는 [[저우언라이]]가 보인다 || [[1973년]] 닉슨이 재선되자 백악관 안보보좌관 직책에 [[국무장관]]까지 겸임하게 됐다.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사임한 닉슨에게서 대통령직을 승계한 [[제럴드 포드]] 행정부에서도 두 직책을 계속 지켰지만, 1975년 11월 [[도널드 럼즈펠드]]가 조직한 할로윈 대학살(Halloween Massacre)이라고 불리는 포드 행정부의 대대적 개각으로 인해 백악관 안보보좌관 자리를 [[https://en.wikipedia.org/wiki/Brent_Scowcroft|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 스코우크로프트는 예비역 [[미 공군|공군]] [[중장]] 출신으로, 10여 년 후 [[조지 허버트 부시]]에 의해 다시 백악관 안보보좌관으로 임명되어, 1991년 [[걸프전]] 승리에 공헌했다. [[1977년]] [[지미 카터]]의 [[미국 대통령]] 취임 이후 공직을 떠났고, 세계 외교계의 원로 대접을 받으며 여생을 보내는 중이다.]에게 넘겨줄 수 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백악관에서의 영향력이 축소되었다. 국무장관 직은 지켰지만.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김대중 납치 사건]] 때 헨리 키신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것을 계기로 그와 개인적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키신저는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예정된 일이었다며 축복하였고, 당시 국내 언론은 키신저를 평화의 전도사처럼 소개하였다(...). 물론 키신저는 결코 선의의 평화주의자가 아니며, 자국의 이익이라면 타국 정치에 대한 개입이나 독재에 대한 옹호도 서슴지 않은 어떻게 보면 현명하다고 할 수 있는 현실주의자였다. [[정치학#s-2.6|국제정치학]]의 관점에서 볼 때 키신저는 전형적인 [[정치현실주의#s-2.1|'''고전적 현실주의자''']]이다. 그는 학자로서도 한스 모겐소와 [[케네스 월츠]] 사이의 가장 중요한 현실주의 학파 국제정치학자 중 한 명이다. 이들은 도덕을, 승자의 정의이자 포장된 권력 유지 이념으로 보기 때문에 '''국제정치에서 합의 가능한 도덕이 존재하는가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이다.''' 그들에게 국제정치의 유일한 정의는 권력(power)과 국익(national interest)이다. 따라서 키신저의 냉정하고 교활한 국익 추구는 현실주의 국제정치학파의 입장에서는 이견 없이 합리적인 것이다. 현실주의자들의 입장은 간단하다. 일견 비도덕적이고 냉혈하게 보이는 행동들이 도덕적 행동들보다 차라리 평화를 지키는데 더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타국에 대한 내정 간섭이나 독재에 대한 옹호로도, [[중국]]과의 핑퐁 외교와 같은 유연한 정책으로도 드러날 수 있다. 따라서 키신저의 도덕성에 대한 공격은 현실주의 학파 전체에 대한 공격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들은 이미 이 문제에 관해서는 학파 발생 시기부터 자유주의 학파와 죽어라고 싸우느라 이골이 난 사람들이다(…). 키신저가 [[네오콘]]의 스승이라는 공격도 있다. 그런데 키신저는 '''[[네오콘]]을 싫어했다.''' 심지어 '''전향한 놈들'''이라고 깠다.[* 로버트 W.메리 저 "모래의 제국"] 또한, 1960년대 [[미국]]의 [[트로츠키]]파 학생운동권이 이후 대거 [[네오콘]]으로 전향한 것을 두고 신뢰할 수 없는 인물들이라 평가했다. 또한 키신저는 [[국무장관]] 시절 중국을 이용해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파격적으로 친중 노선을 주도했던 사람이다. 현실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네오콘]]의 사상은 이상주의적이기 짝이 없는 순진한 발상이다. 미어샤이머를 비롯한 다수의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자들은 [[뉴욕타임즈]]에 [[이라크 전쟁|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는 광고를 냈던 적도 있다. '국가 간 상호 협력으로 평화 유지가 가능하다'고 믿는 자유주의자들이 보기에는 [[네오콘]]의 주장은 너무나 일방적이다. 이는 [[네오콘]] 자체가 국제정치학의 학파들처럼 깊은 학문적 뿌리를 가졌다기보다는 그냥 '''여기저기서 자기 입맛에 맞는 개념만 끌어다가 만든 [[키메라]]'''에 가깝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의외로 [[NLL]]이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발언했던 것이 알려지기도 했다. [[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664718|#]] 과도하게 공약을 지키려는 당선 초기 [[도널드 트럼프]]에게 모든 공약을 지킬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1&aid=0008836289|#]] 키신저는 미국과 러시아와의 관계가 개선되길 바란다면서 그 시간이 곧 올 것이라고 밝혔으며[[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hm&sid1=104&sid2=233&oid=003&aid=0009548543|#]][[도널드 트럼프|트럼프]]가 [[렉스 틸러슨|친러 인사]]를 [[국무장관]]으로 기용한 건 훌륭한 선택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기사에 따르면 키신저가 [[리처드 닉슨|닉슨]]이 [[중국]]을 이용해 [[소련]]을 견제한 것처럼 훗날 강해지는 [[중국]]을 상대로 [[러시아]]를 이용할 수도 있해야 한다고 예견했다고 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8893276|#]] 다만 키신저는 꾸준히 도널드 트럼프의 대중정책에 반대하면서 중국과 우호적으로 지낼 것을 피력하였다. 예를 들어 도널트 트럼프 당선 직후 진행된 [[https://www.youtube.com/watch?v=bfgV2zHME2Y|인터뷰]]에서 헨리 키신저는 대선기간동안 보여준 도널드 트럼프의 반중 레토릭이 진심이 아닐 것이라고 희망하면서 "중국의 국익이 곧 미국의 국익"이라면서 유화적인 대중 정책을 주장하였다.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시에도 헨리 키신저는 미국과 중국은 서로 경쟁할 필요가 없으며 대립을 피해야 한다고 조언하였다.[[https://www.mk.co.kr/news/world/view/2021/11/1087291/|#]] 한국에서는 어째서인지 도널드 트럼프의 친러시아 정책을 대중견제를 위한 포석으로 해석하면서 이것이 헨리 키신저의 조언에 의한 것이라는 얘기가 널리 퍼져있는데 이는 [[https://en.wikipedia.org/wiki/The_Daily_Beast|The Daily Beast]][* 위키피디아에서 Controversies라는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표절, 가짜뉴스 생산, 자극적인 문구 선정 등 미국 내에서 상당히 비판받는 언론이다.]라는 미국 매체가 보도한 내용에 기반한 것이나 헨리 키신저는 해당 보도를 "순수한 창작"이라고 직접적으로 부인하면서 미국과 중국은 서로 친하게 지내야하며 대중 압박 정책같은 것은 할 필요가 없다고 입장을 거듭 피력하였다.[[https://www.scmp.com/news/china/politics/article/2165108/henry-kissinger-didnt-press-donald-trump-work-russia-box-china|#]] 미국과 중국간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해야한다고 헨리 키신저가 평소에 빈번하게 발언했던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판데믹으로 인해 국제질서가 영원히 바뀔 수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에 칼럼을 기고했다.[[https://www.wsj.com/articles/the-coronavirus-pandemic-will-forever-alter-the-world-order-11585953005|#]]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때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상대로 완전한 승리를 얻으려 하지 말고 조속히 협상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https://m.yna.co.kr/view/AKR20220524062800009?section=international/all|#]] 그러나 이 협상 내용이 개전 이전 시점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사실상 우크라이나도 러시아도 만족할 수 없는 미봉책[* 우크라이나는 그 많은 희생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보상도 얻지 못한 채 또 내전을 치러야 하고, 러시아(푸틴)는 우크라이나에서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물러서 현 권력층의 정치 기반을 끝장내야 한다. 이런 식으로 맺어진 협정이나 법령은 유사 이래 근본적 문제를 해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과거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터진 이유도 링컨의 전임 대통령들과 정부 관료들이 지속적으로 미봉책만 취해가며 근본적 문제 해결은 외면한 게 마침내 터져버린 것이 이유였다.]에 불과하여 거센 비판을 들었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뮌헨 협정]]을 언급하며 불가함을 내세웠다. 생애에서 언급된 바처럼, 키신저는 바이마르 공화국 출신의 유대인으로 나치 독일의 폭력을 직접 겪은 이력이 있기에, 나치 독일과 연관된 뮌헨 협정을 언급한다는 것은 강도 높은 수준의 비판이라 할 수 있다. 헨리 키신저가 예나 지금이나 외교적으로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을 고집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반 대중들의 반응은 키신저의 말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장수만세|저 양반이 아직도 살아있어?]]"'''. 그리고 우크라이나의 NATO 가입을 지지하는 등 러시아 비판에 동참하는 발언으로 바뀌었다.[[https://m.yna.co.kr/view/AKR20230118019900009?section=international/all|#]]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